한동안 뜸했던 유시민이 '후불제 민주주의'로 돌아왔다. 18대 총선에서 대구에 무소속 출마했다가 낙선한 후 1년 동안 꽤 조용히 '이명박 시대'를 살아왔던 유시민 전 장관이 최근 '후불제 민주주의'라는 제목의 책을 펴냈다.
오랜만에 책을 엮어내기가 쑥스러웠던지 유 전 장관은 자신에게 '지식소매상'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지난 1년의 삶을 정치적 실패로 인한 '유배 생활' '내적 망명'이라 부르면서 한편으론 '지식소매상'이라는 현재의 명함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낸다.
"맛있는 음식으로 많은 고객들의 입을 즐겁게 하는 데서 기쁨을 얻는 맛집 주인처럼, 나도 재미있거나 유용한 지식을 많은 독자들과 나누어 가지는 데서 행복을 얻는다." 지식소매상 유시민이 이번에 소개하는 '물건'은 바로 헌법이다. 부제가 '유시민의 헌법에세이'라고 붙어있듯 그는 이 책에서 헌법 조항의 의미, 헌법정신에 대해 에세이처럼 쉽게 풀어내고 있다.
그렇다면 왜 헌법일까.
1년 전 촛불을 떠올려보면 유추해볼 수 있다. 시민의 힘으로 '개헌'을 이뤄낸 87년 6월 항쟁의 날로부터 20여년이 지나, 100만명의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다시 모였다. 이 자리에서 불리운 노래가 바로 '헌법 제1조'다. 헌법은 애초에 그곳에 있었다. 두터운 헌법책은 법을 전공하는 이들이 두꺼운 안경을 쓰고 들여다보는 책쯤으로 여겨진다.
유시민 전 장관은 이 책 안에서 이렇게 말한다.
"제헌헌법 덕분에 우리 국민들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사상과 표현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얻었다. 양성평등이 대중적 의제가 되기도 전에 여성들이 동등한 참정권을 부여받았다.
산업화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노동3권이 주어졌다. 대한민국은 시민혁명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민주공화국이 된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놀랍도록 진보적인 헌법정신을 담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헌법을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하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우리는 지난 1년간, 어쩌면 그 사실을 일상의 구석구석에서 매일 체험하고 있다. 유시민은 "대한민국은 처음부터 민주공화국이었다. 1948년 7월 17일 제헌의회가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으로 규정하고 그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기본 질서를 담은 첫 헌법을 공포한 순간부터 그랬다.
나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이 선언한 대로 대한민국이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정통성 있는 민주공화국이라는 데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국민이 헌법이 규정한 질서를 누리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이 있다는 것. 이 대목에서 책의 제목이 왜 '후불제 민주주의'인지 알 수 있다.
"우리 국민이 제헌헌법이 규정한 민주적 기본 질서를 온전히 누리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을 다 지불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헌법은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손에 넣은 일종의 '후불제 헌법'이었고 그 '후불제 헌법'이 규정한 민주주의 역시 나중에라도 반드시 그 값을 치러야 하는 '후불제 민주주의'였다."
유시민은 우리가 지난 1년간 그 값을 톡톡히 치르고 있다고 말한다.
"대한민국 헌법이 담고 있는 민주공화국 정신과 국민기본권을 파괴"하는 '문명 역주행'을 과감하게 진행하고 있는 이명박 정권 하에서 말이다. 야당 시절 국가보안법을 '사수'하기 위해 청계 광장에서 야간 촛불집회를 했던 이명박 대통령이 "대한민국 헌법 제21조를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취급하면서" 촛불집회를 주도한 이들을 구속하는 등의 일들을 매순간 목격하면서......
"오늘 우리가 목격하고 체험하는 상황이 반드시 벌어져야 할 불가피한 사태는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냥 생략하고 건너뛸 수 있었던 상황 또한 아니라고 본다. 이명박 정부와 보수 세력의 '문명 역주행'은 더 행복해지려고 하는 다수 국민의 욕망을 연료로 삼아 시동을 걸었으며, 아직도 그 동력을 상실하지 않았다."
정치평론, 정치에세이에 가까운 분절된 이야기들을 '헌법'이라는 주제를 구성하는 결로 엮어내는 그의 능력은 탁월하다. 그러나 이 책은 목소리가 '현실'로 내려앉을수록 조금씩 불편한 마음이 들게 한다. 유시민이라는 사람이 우리에게 '애증'의 존재이듯, 속시원히 현실을 비판하는 말 속에서 정치 엘리트의 '변명'이 자꾸 목에 걸리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 구절이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는 시대적 과제에 잘 대응했지만 정치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말하면서도 "노 대통령은 '재래식 살상무기'를 버리고 스스로 무장을 해제한 가운데 전쟁에 나섰다. 검찰, 국정원, 감사원, 국세청을 모두 청와대에서 독립시켰고 야당과 보수세력의 거센 정치공세에 시달리면서도 '재래식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힘을 사용하는 대신 말을 사용하는 전투에서 대통령이 야당과 보수언론을 이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고 덧붙인다.
설혹 참여정부가 부족함을 딛고 잘 해낼 수 있도록 '협조'해주지 못한 대가를 국민들이 톡톡히 치르고 있다 하더라도, 그 말이 백번 옳다고 쳐도 유시민 전 장관에게 듣기에는 참 불편한 말이다. 그가 아무리 '지식소매상'이라고 자신을 강조해도 참여정부 핵심인사로서 참여정부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1년의 '유배'와 '망명' 생활을 보낸 후 유시민의 발언은 '성찰과 비판'보다 '변명과 짜증'으로 읽힐 가능성이 커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