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야밀회(月夜密會)] (1805)]달빛만 고요한 한 밤중에 인적 드문 길의 후미진 담장 밑에서 한상의 남녀가 깊은 정을 나누고 있습니다. 남자는 차림새로 보아 관청의 무관인 듯 하고, 그 남자의 여인은 기생인 것 같습니다. 그들의 만남을 한 켠에서 지켜보고 있는 또 다른 여인은 이들의 만남을 주선해준 사람인 듯 하구요. 담장 밖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화가의 시선이 재미있습니다.
먼저 작가의 의도를 보겠습니다 '바람의 화원'이라는 드라마는 소설을 드라마화 한 것입니다. 소설은 10%의 팩트에 90%의 상상력으로 쓰여 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찌 좀 찜찜합니다. 역사를 가지고 장난한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역사란 사실에 근거를 해서 다뤄야만이 혼란이 없다고 생각해서 말입니다. 가끔 역사를 약간씩 변형 시켜서 드라마를 제작하는 건 있어왔지만 성별을 아예 바꿔버리는 엄청난 일은 아직 시도해 본 적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신윤복을 남자로 알고 있는 기성세대나 앞으로 자라나는 아이들도 드라마를 보고 여자로 알지 않겠냐구요. 물론 역사적으로 볼 때 자료가 충분치 않아 상상력을 동원할 수 밖에 없다는 걸 외면은 않겠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확실한 근거도 없이 역사속의 중요한 인물에 대해 남자를 여자로 둔갑시키는 황당한 일은 용납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작가가 신윤복을 여자로 둔갑시킨 이유를 들여다 보겠습니다. 먼저 소설 '바람의 화원'을 들여다 보면 조선 후기 화풍을 주도한 천재 화가 김홍도와 신윤복을 주인공으로 삼았습니다. 김홍도는 궁중화원으로 활동하며 1781년에 어진화사(御眞畵師)로 정조를 그리는 등 드러난 화가였지만, 신윤복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미미합니다.
도화서(회화를 관장하는 국가 기관) 화원이었으나 속화를 즐겨 그려 쫓겨났다는 후문만 있을 뿐 화원이었는지 아닌지도 확실치 않습니다. 역사에 글로 기록된 바는 단 두 줄 뿐. 다만 그림만 남아 그의 생을 짐작케 할 뿐입니다. '바람의 화원'에서 신윤복은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남성으로 살아간 인물로 그려져있습니다. 그 근거를 신윤복의 그림에서 찾는데요,
혜원의 그림 '월야밀회(月夜密會)'는 보름달이 휘영청 뜬 밤 담장 뒤에서의 여인과 별감의 밀회를 별감의 또 다른정인으로 보이는 한 여인이 몰래 지켜보는 광경을 그린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 그림을 남자가 그렸다면 밀회를 지켜보는 사람을 여인이 아닌 남정네로 그려야 정상이라는 것이 작가의 주장입니다.
여기서 잠깐, 관음증은 여자보다 남자가 좀 더 심하다는 걸 작가는 말하고 싶었나 봅니다.
별감의 품에 안긴 여인의 남편이나 정인이라야 더욱 긴장감이 넘치고 인물들의 격정이 보는 사람에게 더 잘 전해질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남장여인이기에 윤복은 남정네가 아닌 여인을 그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깊이 숨겨졌던 여인으로서의 자의식이 발로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그림을 본 후 혜원의 옷태와 생김을 눈여겨본 결과 남장여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고 얘기가 이어집니다. 그런데 저 그림(월야밀회)의 3자가 여자라는 것을 가지고 신윤복은 여자라고 가정한다면, 작가는 참 바보같은 생각을 한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지요.
위의 가계도의 항렬에서 알 수 있듯 남자가 분명합니다. 극 중 재미를 위한 설정이었다면, 자막을 통해 사실과 다름을 충분히 고지하는 배려가 아쉽다고 할 수 있지요. 드라마에 몰입한 국민들이나 청소년들이 신윤복은 여자였다.라고 착각할 수도 있음을 가볍게 여긴 걸까요.
작가는, 독자의 관심을 끌어 돈이나 벌어보겠다는 보겠다는 얄팎한 생각인지도 모르지만 역사를 가지고 장난치는 건 좀 심했습니다. 돈벌이에 역사를 왜곡시키고 그러면 앞으로 자라나는 아이들은 역사를 어디서 어디까지 믿을까 하는 혼동이 초래하지 않을까요. 그림을 그린 사람의 성에 상관없이 저 그림의 3자는 무조건 여자죠. 역사왜곡은 더이상 안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