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인기 탤런트 최진실의 자살 속보는 가히 충격적입니다. 안재환의 자살사건이 최진실까지 삼켜 버렸습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커져 버린 걸까요. 누구의 책임일까요. 일반시민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최진실 같은 스타급 연예인들이 자살까지 실행하는 심리는 무엇일까요. 이번에도

고인이 되어버린 최진실은 한국 연예계에서 스타급에 속한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로 인기를 누려 왔던 여자 연기자 였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연기자였습니다. 자살의 동기는 뒤로하고라도 아직 젊다면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는 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게 합니다.

또한 안재환의 자살로 부터 시작된 이번 최진실 자살에서 보듯이 사회에 파급될 영향도 우려스려운 면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일명 베르트르효과로 일컫는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트르의 슬픔이 당시 독일 사회에 자살 신드롬을 낳게 하듯이 일부 우리 사회에도 그러한 영향이 일어 날까 염려 스러운 것입니다. 일반인들 또한 모방자살이 염려가 되는 대목입니다. 안재환의 사건처럼 말입니다.

특히 지금 한국 사회는 굴절될 경제 제도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으며 어렵게 살고 있는게 사실입니다. 현실의 어려움에서 자살이라는 탈출구는 각 개인의 놓여 있는 환경이나 체질에 따라 큰 유혹으로 다가올수도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가볍게 흘려버려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오죽 했으면 자살을 하겠는가는 자살에 의하여 고인이 되어 버린 영혼을 이해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이 가지는 삶의 본질적 가치에서 자살이라는 의미에 신랄한 비판을 할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대개 두 가지 정도의 가치에 집착을 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존재에 집착을 하는 것이고, 둘째는 비존재에 대한 집착을 한다고 합니다. 흔히들 자살은 두번째 비존재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파괴에 의한 즉, 즉 내가 죽어 버리면 모든 것이 끝나 버린다는 비존재에 대한 집착들이 때로는 자살을 불러오고 한편으로 파괴에 의한 투쟁을 불러 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의 삶은 죽음이라는 절대적 명제를 피할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죽음에 대한 근원적 집착을 하는 우리의 본능적 한계를 뛰어 넘어 내가 당하고 있는 존재와 내가 존재 하지 않을 것이라는 허망한 비존재에 대한 집착으로 부터 벗어나려는 정신적 훈련이 평소때에도 필요한 것이지요.

때로는 스스로 자신한테 관대해 질 필요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한번 왔다가 가는 게 인생인데 물 흐릇듯이 살아 가면 되는 것. 지금 좀 어려우면 어떤가. 지금  내가 부귀 영화를 누리는게 무엇이고 누리지 못하는게 또한 무엇인가."라는 양극단을 배제하고 중도적 삶을 살아가려는 마음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냉정히 본다면 자살도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성 중 욕망의 표현인 교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 버리면 모든 것이 끝나 버린다는 비존재에 대한 집착이 자살이라는 극단적 결과를 낳게 할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인기 탤런트 최진실의 죽음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느껴야 하는 것 일까요.

우리의 삶이 허망하기만 한가요. 그의 가엾은 영혼에 대하여 명복을 빌며 애도만을 하기에는 한때 그가 차지 했던 사회적 비중에 의한 우리 사회 특히 젊은 층에 미칠 영향에 의한 정신 건강의 부정적 면이 심히 염려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자살은 교만입니다.

자살의 지경까지 몰리게 될수 있는 상황을 방지하고 설사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하더라도 삶에 대한 관조적이고 중도적 입장을 견지할수 있는 평소의 마음가짐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할 것만 같습니다.

인생이 별 것 있나요. 그저 왔다가 그저 가는 게 우리의 삶인것을...

사는 동안 담담하게 때로는 애증의 감정의 굴곡에 우리가 기뻐하고 절망하여 무너짐과 일어섬의 반복의 굴레에 놓여 있지만 그저 담담하게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최진실씨처럼 우리 사회에 슬픈 메세지는 던지지 말자는 것입니다. 각자가 희망을 주기에도 우리에게 놓여진 시간들이 그리 넉넉치가 않답니다.

다시한번 고인 최진실씨의 영혼에 대한 명복을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