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스페셜 방송을 보고 두 가지 점에서 깜짝 놀랐습니다. 원작자와 대본 작가 그리고 연출가에 이어 부상 당했다 알려진 문근영 씨의 출연이 하나요, 이 드라마가 열띤 호흥을 얻고 있는 이유 중 하나에 굳이 제작진이 애써서(그것도 똘똘 뭉쳐)화들짝 토를 단 사실이 또 다른 하나입니다.
DVD가 발매되기 전 코멘터리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제작진(사고가 의도된 게 아닌, 어쩔 수 없는 편성 탓이라해도)에게 감사의 인사 먼저 전합니다. 더불어 목소리를 통해 무탈할 거란 안도감을 전해준 배우에게도.. 인사는 여기서 각설하고. 전 제목을 '삽질할 자유를 짓밟지 마오'라 하였습니다.
제작진이 정향과 윤복과의 감정선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는 시청자 층에 적어도 그런 식의 대응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원작자의 힘까지 빌어서 말이에요. 드라마[바람의 화원]란 텍스트는 시청하는 모두에게 공유된 것입니다. 하나의 드라마를 우리 모두 공평하게 각자의 공간에서 감상하고 있지요. 하지만 그걸 놓고 감상하는 몫은 각자의 것입니다.
여기에 "난 당신과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느껴"라고 할 순 있지만 적어도 제작진의 우월한, 일방적인 전달자 위치에서 오늘과 같은 태도를 취한다는 건 다양성을 존중해야 할 창작자의 도리가 아니라 봅니다. 그런데 오늘 제작진은 그런 도리를 깜빡 하셨습니다. 윤복에게 그림 모델이 되어주는 정향의 장면을 보여주며 원작자뿐 아니라 대본작가, 그리고 연출가는 일심동체 되어 "동성애는 아니라 생각한다. 윤복에게 정향은 뮤즈다"라고 말씀하시더군요.
후후, 그래요. 기생 정향은 도화서 생도 윤복에게 뮤즈 입니다. 뮤즈 (그리스 신화에서 예술, 과학을 관장하는 여신 무리에서 기원)가 뛰어난 금기(禁妓)라 하여도 하룻밤 술판의 유희거리가 되고 마는 천한 기생인 정향. 서글픈 운명에 주저앉아 버릴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 여인에겐 특별한 점이 있습니다. 예인으로서의 긍지입니다. 또 어엿한 한 사람으로서 존재하고자 하는 소망입니다.
정향은 자신보다 지체 높은 이의 희롱에도 주눅들지 않고 유려한 가얏고의 음률로 세련된 대꾸를 하며 그런 의지를 극 주인공 윤복과 시청자 모두에게 인상 깊게 남긴 바 있지요.(2부 생도들의 술판 장면) 그런 정향, 미색과 마음씨 까지 고운 사람이니 이 어찌 여신의 경지라 아니라 할 수 있겠습니까.
첫 만남에서부터 이미 알 수 없는 설렘과 매혹으로 정향에게 빠져들던 시선을 보이던 윤복은 아예 대놓고 예찬하며(보여주시오, 그대의 굳건함..주절주절) 그 속속들이까지 알고자 한다 하였고 정향 역시 자신을 한 사람과 예인으로 아름답게 바라봐주는 윤복에게 감동하여 옷까지 벗었던 게 지난 5회였습니다.
공중파임에도 여신을 탐미하는 윤복의 손길은 거침없었고 그 손길을 받은 정향은 더없이 아름답게 연출되었던 바로 문제적 장면 말이지요.(그네씬이 은유적 표현으로 피해갈 수 있었던 것과 달리) 윤복은 문근영이라는 여자 배우가 주인공을 맡은 것에서 누구나 알 수 있듯 남자 복색에 가려진 여인네고 정향도 보는 그대로 가야금 재능이 남다른 (미색까지)기생입니다.
시청자가 보기엔 두 여인네가 엄연히 이렇게 얽혀 있는데 거기에다 동성애란 감상. 표현을 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정말 이상한 부류의 사람들인 겁니까?(오늘 스페셜로 방송된 걸 보고 나면 그렇다는 제작진의 대답 아닌 대답으로 들립니다) 그런데 좀 웃깁니다. 한참을 웃깁니다.
기껏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은 채 6회까지 대본도 연출도 진행해 놓고선 이제 와 그렇게 감상하고 있는 시청자 층(설령 극소수라 하여도) 에게 "이 둘은 예술가와 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의 관계이다."라고 안면을 싹 바꾼 채 말입니다.(그것도 작심한 듯 똘똘 뭉쳐, 일방적인 전달자 위치에서) 엄쳑히 예기하면 기생 정향의 처지에선 절대 동성애가 아닌 건 맞습니다. 그는 감쪽같이 남자 행세하는 윤복의 정체를 알지 못하니까요.
엄연히 세상 다수가 공인마크를 붙일 만한 이성애적 감정이 격류에 휘말린 여신입니다.(여신이 희롱당했다 생각하니 조금 웃기긴 하네요) 그런데 윤복은 아닙니다. 그는 첫 만남부터 정향에게 소년처럼 설레인다는 표정 마구 뿜어댔고 또 수작을 걸었으며 엄청난 통증으로 정신을 잃어가면서도 아름답다 주절댔지요. 정향에게 줄 선물을 고르며 활짝 웃고 그 선물을 주겠다며 이른 시각부터 냅다 달려가던 사람이지요.
그런데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뭘 도대체 사랑의 감정이라고 하고 싶은 건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사랑도 처음엔 뮤즈로 출발합니다.(그 뮤즈가 점차 일상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는 시큰둥함으로 변해가서 그렇지) 별일없던 인생에 빛을 들게 하고 저 사람 때문에 가슴이 마구 요동치며 뭐라도 주고 싶고 또 알고 싶고 머리보단 가슴에서 기키는 일을 먼저 하게 만드는 그 대상이 삶의 뮤즈가 아님 뭐겠습니까. 그런 뮤즈를 향한 맘이 사랑이 아니면 또 뭐겠는지요?
남자 복색에 같힌 XX염색체 윤복이 같은 XX염색채의 정향을 제 뮤즈로 여기고 또 적극적 행동을 보이지 동성애적 관계로 느껴진다 하는 걸 삽질이라고 규정하고 싶으시면 그렇게 하십시오. 하지만 삽질 할 만해서 하는 삽질이니 그 지유를 짓밟는 일은 하지 마십시오. 전 이 둘의 관계를 보고 전혀 그렇게 안 느껴진다거나 혹은 당신이 이상한 거요, 하는 것엔 이의없습나다. 이렇게 느끼는 게 제 자유이 듯 그리 안보는 것 역시 그 사람의 자유니까. 단, 제작진은 적어도 그런 행태를 보이면 안 된다고 봅니다.
완결되지도 않은 작품에, 각자의 시간을 내어 개인적 관심사를 표출하는 관객에게 일방적 우위를 점한 발언대에 서서 지금 당신이 느끼고 있는 건 좀 아니라고 붑니다. 정말 이거야 말로 관객에게 제작진이 행할 수 있는 가장 큰 오만불손함이고 또한 배은망덕입니다.
시청자를(극극 소수라 해도)가르치려 하지 마십시오. 텍스트를 만든 건 제작진/창작진이지만 그걸 즐기며 더욱 풍부하게 감상할 몫은 시청자의 것이니까요. 아무리 창작자의 머릿속에서 나왔다지만 한 번 그게 세상 밖으로 나온 순간 그건 일개 창작자의 것이 아닙니다. 제발 삽질의 자유를 짓밟지 마십시오. 두번 다시는...
문근영이 제작진과 그런 얘기를 할 때 쬐끔 속상했습니다. 하지만 금세 사라졌습니다. 원작자까지 나서서 화들짝 식겁(?)하는 저 같은 이의 감상법이 행복한 삽질이라고 여길 수 있도록 한 일등공신이 바로 당신이니까요. 문근영 당신은 [바람의 화원]의 신윤복으로 아낌없이 보여 주었습니다. 앞으로 또 다르게 전개되어도 그 모습 격한 애정으로 지켜 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