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희, 쇼윈도 안에 구현된 유토피아 혹은 불가능한 꿈의 소비
"예를 들어 조심스럽게 유포된 그레이스 켈리의 '숙녀' 이미지는 그녀의 실제 가족 배경에 견고하게 토대하고 있는 것이다. 윤택함과 우아한 교양, 가족 간의 친밀한 연대의 산물로서 그녀는 가족구조 내에서 남자들의 이상적인 동경을 대표하는 위상으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홍보의 지원을 받아 그레이스 켈리를 이상적인 대상으로 전형화했다면 마릴린 먼로를 이상적인 '즐기는 상대(playmate)'로서 구축하는 데 있어서도 같은 효과를 달성했다. 토마스 해리스라는 미국의 문화비평가는 1957년 발표된 '대중적 이미지 만들기-그레이스 켈리와 마릴린 먼로'라는 논문에서 상반된 이미지의 두 톱스타 여배우를 '이상적인 대상'과 '즐기는 상대'로 이분화했다.
이를 2007년 대한민국의 대중문화계에 적용한다면 '즐기는 상대' 역할에 어떤 여성 스타가 적합한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섹시한 춤과 육체를 내세우며 쏟아지는 여성 가수들이 이 자리를 두고 경쟁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화된 대상'으로서의 여성 톱스타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만큼은 답이 자명하다.
방송 영화 등 연예 관계자들과 성형외과 의사들조차도 '가장 완벽한 미인' '가장 아름다운 여성'으로 꼽는 배우는 김태희(27)다. 2001년 데뷔 이후부터 여전히 강조되고 있는 '서울대 출신'이라는 프로필과 매일같이 반복되는 다양한 TV CF는 물론이고 탤런트로 활동하는 남동생 이완까지 대중에 노출된 모든 사항이 그녀의 우아한 교양과 귀족적인 분위기, 윤택하고 모범적인 이미지를 강화한다.
2007년12월13일 개봉한 영화 '싸움'(감독 한지승)은 김태희가 '중천'에 이어 꼭 1년 만에 다시 한번 '영화배우'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감행한 야심 찬 도전했지만 대중은 그녀를 여전히 '스타'로서 소비한다. 그것은 때로 CF를 매개로 그녀의 완벽한 아름다움에 보내는 끝없는 찬사로 나타날 때도 있고, 연기력 논란이라는 비난으로 드러날 때도 있으며, "나는 김태희랑 절대로 결혼 안 한다"는 냉소적 자포자기로 이어지기도 한다.
'포스트 전지현' 혹은 쇼윈도 안에 구현된 유토피아
김태희는 최근 국내 광고 포털 TV CF가 지난 1년간 광고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국내 광고에 가장 많이 등장한 스타 중 한 명으로 꼽혔다. 김태희는 휴대전화 디지털카메라 화장품 카드 등 1년간 무려 18개 상품(브랜드)의 광고에 출연했다. 1999년 프린터 TV CF에 출연해 테크노댄스를 선보인 후 신드롬을 일으키며 2000년대 중반까지 광고모델계를 지배하다시피 했던 전지현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전지현은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CF로 상징되는 현대사회의 욕망을 전시하는 최고의 '브랜드'였다. 전지현은 휴대전화 카메라 mp3 등 디지털시대 신세대가 열광하는 새로운 욕망과 육체성을 늘씬한 몸매와 청순한 마스크, 섹시한 춤으로 담아냈다. 청순함과 섹시함이 전지현이 표상한 덕목이었다면, 김태희는 우아하고 지적인 이미지를 내세워 광고계를 장악했다.
이영애가 부유한 상류층 도시 여성의 '로망'이라면 '천재적 카드생활'(BC카드)을 하는 알뜰하고 똑똑한 김태희는 한층 젊고 능동적인 인상을 강조한다. 화장품 광고에서는 화려하고 고혹적인 귀족(헤라)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남자에게 무시당하며 굴욕(마티즈)을 당하거나 남자친구에게 애교 떨듯 앙증맞은 춤(LG 싸이언)을 춘다.
비유컨대 이영애가 '럭셔리 수제 명품', 전지현이 '섹시하고 세련된 디자인의 MP3'라면, 김태희는 '명품 브랜드와 퓨전 된 휴대전화'인 셈이다. 한때 '포스트 전지현'의 유력주자였던 문근영이 특유의 친숙한 이미지 때문에 가상의 가족관계 내에서 호명(여동생)됨으로써 발목이 잡혔던 것과는 달리, 김태희는 애초부터 '눈앞에 있지만 닿을 수 없는 존재'였다. 전지현에 이어 현대사회의 소비욕망을 완벽하게 구현하는 김태희는 '쇼윈도 속 유토피아'다.
울음과 웃음, 평범함마저도 박제화된 '모범생'의 딜레마
최근 김태희를 기용한 CF의 전략은 김태희의 코믹하고 깜찍하며 앙증맞은 모습을 강조하는 추세다. "빛나는 TV는 김태희도 춤을 추게 한다"는 카피 아래 엉덩이를 귀엽게 흔들거나 "가위 바위 보 하나 빼기"를 하며 뿅망치를 휘두르는 모습은 처음에는 파격이었고 나중에는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영화 개봉을 전후해서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김태희의 기자회견 및 인터뷰가 이뤄지지만 대부분은 '특별한 김태희의 지극한 평범함'을 드러내거나 화려하고 완벽한 이미지 뒤에 가려 있는 인간적인 면을 부각하는 데 할애된다. "어렸을 때 남자아이들 코피 좀 터뜨렸다"는 일화,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이 예쁘다고 생각할 줄 몰랐다"는 토로, "단순해서 머리 쓰는 것 잘 못한다"는 고백은 김태희의 어린 시절이나 일상이 남과 다르지 않다는 것, 그저 '판박이 미녀 스타'만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영화 촬영 에피소드도 "와이어에서 떨어지고 구르면서도 액션 연기에 몸을 살랐다"(중천)든가, "타조농장에서 피부병에 걸리면서도 연기 투혼을 보여줬다"(싸움)든가 하는 씩씩하고 과감한 면모를 강조한다. 하지만 이마저도 대중에게는 '박제화된 이미지' '규준화된 전형성'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대학 입시에서 수석을 한 학생으로부터 "잠 5~6시간씩 충분히 자면서 수업과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다"는 말을 들을 때처럼 대중은 묘한 배신감을 느낀다. 연기력 논란도 마찬가지. 보기에 따라서 또래 배우나 비슷한 경력의 스타들에 비해 크게 모자랄 것도, 넘칠 것도 없다고 볼 수 있을 테지만 김태희의 연기를 향한 거센 비판은 "공부 잘하고 예쁜 것이 놀기까지 잘한다면.."에 대한 경계심리에도 기인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나는 김태희랑 절대 결혼 안 해' 불가능한 꿈의 소비
'중천'에서 김태희는 누가 봐도 배우로서는 아직 갈 길 먼 '초보'라는 사실을 보여줬다. 이혼한 젊은 커플이 마음의 미련과 앙금을 채 다 지워내지 못하고 전쟁 같은 싸움을 벌이면서 사랑을 재확인한다는 내용의 '싸움'에서 김태희는 전작보다 분명 진일보한다. 물론 분노와 증오를 표현하는 대목에서 발성이 다소 불명확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김태희는 훨씬 더 다양한 표정과 자연스러운 억양으로 설경구와 호흡을 맞춰간다.
영화 전체적으로는 두 남녀의 심리 변화 계기들이 설득력은 떨어지지만 김태희는 ‘고군분투’라 할 만한 노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김태희가 '배우'로서 온전한 평가를 받기에는 역부족인 듯 보인다. 김태희는 여전히 '현대사회의 욕망을 전시하는 유토피아'이되, 쇼윈도 속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대중은 자신의 욕망이 쇼윈도 유리벽에서 되튕겨 나올 때마다 "나는 김태희와 절대 결혼 안 한다"는 냉소적 자포자기로 대꾸하거나 이상향을 향한 동경을 맹목적인 분노나 질시로 바꾸기 때문이다.
결국 쇼윈도를 뚫고 나와 대중에게 손 내미는 일은 김태희의 몫이다. 18개의 CF, 완벽한 외모, 스타의 신화, 뛰어난 연기, 평범한 미덕, 그 모든 것을 다 가지려 할 때 김태희는 결국 어느 하나도 갖지 못한 채 '박제화된 아이콘'으로 남을 것이다. 대중은 그녀가 선전하는 상품의 논리같이 냉정해서 언제든 또 다른 김태희의 대체재를 만들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전지현을 지나 김태희의 시대가 왔듯이.